언젠가 생각과 자료가 정리된다면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에 관한 글을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있다.
만약 쓴다면 첫번째는 역시 [홍길동67]에 관한 글이 될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잃어버린 역사의 관점에서 쓰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틀전, 난 경향신문에서 오싹하고 소름이 돋는 글을 읽었다.
앞으로도 한국 애니메이션계의 전설로만 전해지며, 절대로 눈으로 확인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홍길동67]의 필름이 발견된 것이다...
1.한국 최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CF나 다른목적을 위해서가 아닌, 일본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은 무엇일까? 대부분 알고있겠지만 데즈카 오사무의 철완아톰 TV판이다.
1963년에 제작된 이 애니메이션을 모르는 애니메이션 팬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금 보면 그다지 좋은 퀄리티는 아닌 이 흑백 애니는 당시로써는 상당히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반복적인 동작과 초당 16프레임 이하로 줄여버린 이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은 일본인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그 인기는 한국까지 전해졌다. 그 당시 아시아에서 실사 이외의 영상물을 처음 접한 한국과 일본 사람들에게는 분명 어마어마한 충격이였을 것이다. 그림이 움직인다니!(이당시 애니메이션이란 디즈니 이외에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였다.(내가 알고있는 것이 정확하다면 최초는 럭키 치약CF이며, 일반 카메라로 필름을 찍는 정말 열악한 제작 환경이였던 것으로 안다.)
전후 일본의 우울하던 시기에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며, 과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아톰.
그리고 더욱더 우울하던 시기의 한국...
그후 4년. 애니메이션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것이 없던 한국에서 최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개봉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신동헌 감독님의 [홍길동67]. 전설의 시작이였다.
2.독보적인 퀄리티.
홍길동67이 세운 기록은 어마어마하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기법은 보통 데츠카 오사무에서 린타로에게 이어지는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이 최대한 활용 할 수 있는 테크닉을 만들어왔다. 이건 현실적인 문제인데. 일본이나 한국이나 땅덩어리가 작고 인구도 그다지 많은편이 아니기에 큰돈을 들일 수 없다. 90년대에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일반인들은, 보통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부드럽고 일본것은 딱딱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왔다. 이건 당연한 것인데. 쉽게 말해 물량전이다.
1초에 24장의 그림이 풀로 들어가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당연히 더 부드러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그많큼 시장이 받처주는 것이다.)
대신 일본의 경우는 동화매수가 적은 대신 배경의 디테일이나, 광원효과등의 특수효과를 이용한 눈속임. 또는 연출의 변화를 통해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오늘의 일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온것이다.
즉, 오늘날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일본조차도 감히 꿈 꿀 수 없었던 것이 초당 24장의 그림이 돌아가는 풀 애니메이션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해낸 것이 [홍길동 67]이다.(물론 그전에 진로소주CF가 있지만, 장편애니메이션이 아님으로 넘어가자.)
홍길동의 총 동화 매수는 12만 5천 3백장이다. 이건 엄청난 물량이다. 80년대에 제작된 아키라가 13만 5천장인걸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물량으로 지금도 쉽게 흉내낼 수 있는 물량이 아니다. 덕분에 홍길동은 당시 디즈니 못지않은 부드러운 움직임을 가지게된 것이다.
물론 움직임이 부드럽기만 한것은 아니다. 두번째 특징은 선녹음 방식이다. 어지간히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한국이나 일본이나 아직까지는 영상을 만든뒤 영상에 맞춰 성우들이 연기를 한다. 이방식은 연기할때 성우들이 상황을 쉽게 파악하고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 할 수 있지만, 미세하게 입모양과 목소리가 맞아 떨어지지 않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미국에서 주로 쓰이는 방식이 선녹음방식으로, 성우들의 연기를 바탕으로 입모양을 맞춰서 그리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90년대까지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뮤지컬부분이 강한면이 있었다.(하루히의 밴드 연주 부분도, 완성된 노래에 원화를 맞추어 그렸을 것이라 추측한다. 거의 80%이상 확신하지만, 개인적인 추측일뿐이다.) 문제는 돈이 훨씬 많이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홍길동은 지금도 시도하기 힘든 선녹음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세번째는 이중촬영 기법이다. 지금은 별 것 아니지만, 당시에는 디즈니가 아니면 시도하기 힘들었던 기법이다. 멀리있거나 너무 가까이있는 배경의 초점을 흐려서 원근을 표현하는 기법으로, 포토샵의 블러필터라고 생각하면 쉽겠다.(카매라가 취미인 감독님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기법이라고 밝혀 더욱 놀라게 만든 부분이기도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60년대에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이면서 풀컬러였다고 하는 점 역시 빼놓을 수 없겠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모든것이 열악한 시설과 노하우도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정말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수없다.(필름이 부족해서 미군이 항공촬영할때 썼던 필름을 양잿물에 씼어서 다시썼다거나, 셀이 부족해서 미군이 버린 비닐을 수거해 사용한 일화는 이미 전설로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 수준의 눈으로 보자면 댓생이 나갔다거나, 연출이 지루할수도 있지만, 당시의 애니메이션으로는 세계에서 미국이외에는 경쟁상대가 없는 퀄리티였다.
정말 뛰어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말겠다는 무시무시만 열정과 집념, 그리고 뼈를 깎는 고통이 만들어낸 기적일것이다.
3.애니메이션을 발전시키지 못한 한국의 문화 시스템
물론 엄청난 퀄리티답게 홍길동은 엄청난 흥행을 한다. 지금처럼 애니메이션에대한 삐뚤어진 사고방식이 존제하지 않던때라,(어린친구들은 잘 이해가 안되겠지만, 내가 어릴때는 담배, 만화방, 오락실은 비행청소년의 3대 상징이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이 애니메이션을 보기위해 몰려들었다.
1967년 1월 7일. 대한극장 앞에서는 이 애니메이션을 보기위해 늘어선 엄청난 줄을 목격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개봉 4일만에 1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수치는 당시의 인기를 실감하게 해준다.(예상외의 큰 흥행으로 극장에서는 써비스로 500명마다 설탕을 한푸대씩 퍼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있다. 90년대 중반 잘나가는 한국영화가 30만관객이였던것을 떠올려보자.)
아무튼 홍길동의 흥행후. 신동현 감독님은 후속작품 [호피와 차돌 바위 67]을 동아극장에서 상영. 또다시 흥행에 성공한다.
하지만 신동헌 감독님은 그후,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않게되었다.([돌아온 영웅 홍길동95]은 이름만 총감독이였지 사실상 일본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영화사들이 돈만 챙기고, 투자를 해주지않았던 상황에서 신동헌 감독님은 제작비를 회수하지못해 집을 날릴뻔 한 것이다.
이렇게 두편의 애니메이션을 통해 얻어진 많은 노하우들은 신화로만 끝나며 물거품 처럼 사라지게된다.
그후 손에 꼽을 흥행작들이 나타난적도 있지만(로보트 태권V등이 있겠다. 물론 완성도로 따지자면 홍길동 만큼은 아니겠다.)
그것들조차 단발로 끝나며, 군사정부에 의한 문화에 대한 탄압, 애니메이션과 만화에 대한 무시등으로, 한국 애니메이션은 결국 발전하지 못한다.
그리고 홍길동의 전설은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갔다.
4.다시 찾은 홍길동의 의미.
지금도 나는 가끔 생각한다. 만약 홍길동 후에 꾸준히 애니메이션이 제작, 발전되었다면 한국의 애니메이션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을까라고...
나름대로 우리나라 시장에 맞는 모습으로 발전되어가지 않았을까? 지금보단 나같은 딴따라가 희망이 있지않았을까?
물론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다.
하지만 미래는 바꿔갈수있다. 과거를 바탕으로 반성하고 인식을 바로 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것은 없지않을까?
이번에 필름이 발견된곳은 부끄럽게도 일본이다. 돈을 만지고 버려버린 필름과. 이웃나라의 문화이지만 가치를 알고 소장하고 있었던것.
많은 생각을 하게한다.
두사람의 천재가 있다.
일본에는 데츠카 오사무라는 천재가 [철완아톰]을 제작했었다.
한국에는 신동헌이라는 천재가 [홍길동]을 제작했었다.
한 사람은 애니메이션의 아버지라 불리며, 꾸준히 칭송받고 기억되며,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서서히 잊혀지고 있다.
[참고문헌]
월간모션(1998년 패간)
애니스쿨(1997년 서울문화사)